우리는 신앙의 현상유지를 지향하면 안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매순간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이 매순간 나를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를 정말 사랑한다고 하자. 그 사람을 매일 생각하며 그의 사랑 안에 매일 들어가 머문다고 하자. 그럴 때 내 마음과 행동이 그 지점에 계속 머무는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정체해 있는가? 아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만큼 매일 그를 향하여 사랑이 자란다. 사랑이 자라면 마음도 그쪽으로 다가가고 행동도 그쪽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이게 자연스런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를 정말 사랑하고 매일 그의 사랑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하면서 마음이나 행동이 현상유지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정체하지 않는다. 매순간 그분의 완전한 사랑을 향하여 계속 전진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 영혼에 빛을 비추셔서 우리의 부족함을 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매순간 주님께로 가까이 전진하는 동력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는 데서 나온다. 여기에 성화를 위한 신자의 회개가 연결된다. 신자는 처음 예수를 영접할 때 회개가 필요하고, 그다음에는 성화를 위해 계속 회개가 필요하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보면 바울이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현재형으로 고백하고 있다. 정말 바울이 그런 사람일까?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도로 열심히 일하는 중에 이런 고백을 하는데, 바울은 이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지 않았나? 그런데 여전히 “현재형으로” 죄인이라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구원파의 논리에 따르면 바울은 아직도 회개할 죄가 있다고 하니 지옥에 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칭의를 위한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위한 회개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여기서의 바울의 고백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에 자기 영혼 속에 남아 있는 죄를 선명하게 보기 때문에 회개를 통해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